친일파의 표본(을사오적)
페이지 정보
작성일 22-09-17 16:08
본문
Download : 친일파의 표본(을사오적).hwp
.. , 친일파의 표본(을사오적)기타레포트 ,
_hwp_01.gif)
_hwp_02.gif)
_hwp_03.gif)
_hwp_04.gif)
_hwp_05.gif)
_hwp_06.gif)
,기타,레포트
Download : 친일파의 표본(을사오적).hwp( 98 )
순서
충청북도 영동출신. 일찍부터 일본어를 습득하여 일본정계의 사정에 정통하였는데, 이러한 능력이 인정되어 1883년 부산 감리서 서기관에 임명되었다.친일파의 표본(을사오적)
충청북도 영동출신. 일찍부터 일본어를 습득하여 일본정계의 사정에 정통하였는데, 이러한 능력이 인정되어 1883년 부산 감리서 서기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04년 육군부장 (陸軍副將)으로 임명되어, 당시 노일전쟁중인 日本(일본)군의 위문사 (慰問使)가 되어 요양(遼陽), 여순(旅順)을 순방하였다.
나중에 日本(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과 조선사편수회의 고문 등…(투비컨티뉴드 )
설명
다. 그 공로로 日本(일본)에서 훈일등 서보장 (勳一等 瑞寶章)을 받고, 다시 훈일등 팔괘장(勳一等 八卦章)을 받았다. 1894년 한성부윤, 1895년에 내각총서 (內閣總書), 1896년에는 법부협판 (法部協辦), 이듬해에는 농상공부 협판을 역임하였다...
레포트/기타
충청북도 영동출신. 일찍부터 日本(일본)어를 습득하여 日本(일본)정계의 사정에 정통하였는데, 이러한 능력이 인정되어 1883년 부산 감리서 서기관에 임명되었다.
많은 훈장과 함께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한 사람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다.
1905년 8월에 군부대신, 이어 9월에는 농상공부대신이 되고, 1906년 다시 군부대신을 역임하다가 1907년 5월 박제순 (朴齊純)친일내각의 총사직으로 함께 물러났다. 1898년 의정부의 참찬, 찬정 (贊政)을 거쳐 농상공부대신으로 승진되었고, 1899년에는 법부 농상공부 대신을 겸임했다.
이어 같은해 칙명으로 다시 日本(일본)으로 건너가서 육군 대연습을 참관하였으며, 또한 고종의 황제위호(皇帝位號)상소자의 한 사람이 되어 그 공로로 정2품에 올랐다. 1888년에는 조定義(정이) 명을 받고 日本(일본)을 직접 견학하고 각종 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1891년부터 주일공사로 동경에 재임중, 오스트리아와 수호통상, 항해 등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특히, 1905년 농상공부대신으로 있을 때 을사조약 체결에 찬성하여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규탄을 받았는 도중, 1907년 을사오적 암살단인 나인영(羅寅永) 등에게 서울 사동 어귀에서 한낮에 저격을 당하였으나 요행히 화를 면하였다. 그뒤 곧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칙명으로 日本(일본)박람회를 시찰하고 거기서 같은해 12월에 훈일등태극장을 받고, 1908년에는 다시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